(짙은 남빛 계열의 예복을 갖춰입은 소녀가 고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조명탓에 표정이 상세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탁하게 가라앉은 자수정빛 눈동자는 또래에 맞지 않게 진중하고 또 음울해 보인다. )



저는 최근에 아버지를 잃은 상가의 여식입니다.

아버지의 사인은 약물로 인한 심장마비. 세간에서는 평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일부러 모종의 약물을 먹이고 있었노라고 수군거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들의 추측은 모두 틀렸습니다.

아버지에게 물약을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제가 한 일이니까요.

 

아버지는 그리 자상하지는 않은 분이셨지만 그래도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성실하셨던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바쁘다며 저를 멀리하셨으니까요.
때문에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한시 바쁘게 서재로 들어가시는 뒷모습이나, 저택을 나서는 마차소리밖에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일반적인줄만 알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더랬죠.

 

하지만 사제님. 아이라는 생물은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성장합니다.

벽을 짚고 일어서는 순간에, 그리고 계단을 내려갈 수 있게되는 순간에.
문고리를 잡아당길 만큼 손아귀의 힘이 세지는 순간에.
옹알이를 하며 눈알을 굴리는 것에서 벗어나 다녀오세요. 아버지. 라고 말할 수 있게되는 순간에.

아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인간의 세계는 매 순간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넓어지며 그 안에 남겨진 먼저 자라난 자들의 흔적을 읽어들입니다. 그리고 알게되지요.

 

아, 그렇구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내가 아들이 아니기에 내가 이 집안을 이어받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구나.

내가 자라나 이 집안을 이어받게 되면 나 역시 '어머니(상단의 주인)'가 되기에.

그리고 나와 결혼하게 될 어떠한 누군가는 결국 또다시 '아버지(데릴사위)'가 되기에.

 

우스운이야기지만 아버지는 언젠가 '상단의 주인'이 될 저에게서 어머니를 겹쳐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저를 거부하셨던 모양이구요.

물론 이런 거부는 지금의 '상단의 주인'인 어머니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부정하는 순간 이 집에서 잘려나가는 쪽은 '데릴사위'에 불과한 자신이었을 테니 이는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감정,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숨막히게 하는 열등감이었겠지요.

어린 저는 아버지가 저에게 그러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해를 하면, 언젠가 해결책을 찾아낼 지도 모르니까. 

다정하기를 바란적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저를 보호해주어야 하는 '아버지'가 아닌가요.
그러니 분명 어떠한 사정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요. 

아버지라고 노력을 안하는게 아니셨고 야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성취하는 기쁨과 무시받는 슬픔이 없는 것도 아니셨을텐데. 분명 제가 모르는 시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겠지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하건 결국 상단의 일환으로, 자신이 아닌 어머니의 성씨로 기록되는 것에 분명 제가 이해 못 할 어떠한 고충이 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 분을 이해하기 위해 부러 눈을 감고 귀를 닫았습니다.

그분이 어른이니까. 나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어리고 미숙한 저는 그분의 현명함을 믿었고 부족한 그릇으로 슬픔을 헤아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깨진 거울조각 뿐이었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항상 가장 현명한 선택만 하셨던 어머니조차 그토록 가족이라는 연극을 이어가기 위해 인내하고 노력했는데, 아버지는 너무나도 손 쉽게 자신의 역할을 부정하고 어머니의 앞에서 돌아서셨습니다.
깨진 유리를 밟고 저를 지나쳐 나아가셨지요. 

 

제가 어머니의 집무실로 올라가기 직전, 저는 현관까지 울리는 아버지의 절규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자신이 너무나도 슬프다고 말씀하고 계셨지요.

이 집안에 와서 자신이 지워진 것 같다고. 내가 나로서 사는 것을 죄악시 여기는 시선에 숨이 막히다고.


그러나 왜 아버지는 당신만이 상처입고 당신만이 슬픔을 느낀다고 생각하셨던 걸까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이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개인에게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제한한 적 있냐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담배를 피우라고 하지 않았냐고. 반짝이는 구두를 사고 싶으면 구두 가게를 사들이고 그 구두를 뽐내고 싶으면 연회를 열든 무도회장을 가든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그러나 딱 하나 이 집안의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었죠.
그것은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주신 가르침. 그리고 이제는 제가 이어나가야 하는 가르침.
이 집안의 상단은 분명 저와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이름과 같은 상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한번도 우리 중 누군가 개인의 소유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어머니의 이름을 나눠받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단의 이름으로 근거없는 약속을 하지 말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어음을 발행하지 말고.
사람들의 입에 이름이 오르내릴 일을 삼가하고, 가능한 모든 일에 대해서 상담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나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숨통을 죄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도 마음과 생각이 있다며 그러한 족쇄들이 자신의 마음을 죽이라고 말하고 있는거라고 반박하셨죠.

 

그러나 결국 그 분이 말하는 '마음'이란 자신이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말하는 것이었고  '생각'이란 자신의 판단대로 진행한 사업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리스크를 생각하지 않고 심사숙고하여 이 결정으로 이어질 책임에 대해서 준비하지 않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음'은 부정하지 않으셨지만 '생각'을 고집하려면 상단을, 최소한 어머니 당신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안된다면, 상단의 위명에 기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아버지는 당당하게 이번 일은 온전히 자신의 일이며 단 한번도 이 집안의 위명에 기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니죠. 아버지가 사랑하신다는 그 '사업'은 처음부터 그럴 수는 없었어요. 


당장 아버지가 고객들을 만나기 위해 출입하고 있는 그 사교클럽이 무엇을 보고 아버지를 받아들여준 것일까요. 비싼 정장? 향수? 최고급 소재와 잊혀진 마법사의 보석으로 장식한 지팡이?
물론 아버지의 개인적인 자산으로도 그 정도 외형은 충분히 꾸며내실 수 있었겠죠.
하지만 아버지의 '고객'들과 어울리기 위해선 그것만 필요한게 아니거든요.


그들이 아버지에게 보이는 호의나 관심, 화제의 선정.
애초에 그들이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까닭 부터가 그들이 아버지를 아버지 개인으로 보고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상단을 충분히 이어받을 수 있었음에도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고른 이유이기도 했고,
어머니가 모든 실권을 쥐고 계셨음에도 대외적으로는 아버지가 '상단주'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죠.

 

아버지는 그러한 내막이, 실권없이 이름만 넘겨받은 자신의 이름이 진실되지 못하다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세상에 정말로 '진실된' 관계가 얼마나 있을까요?
당장 아버지가 엮이신 그 '사업가'분들도 그리 진실되지는 않았던것 같은데, 왜 아버지는 그토록 수상쩍은 곳에서 그놈의 인정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하셨던 것인지요.

 

저는 제가 아버지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신 이유 또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더이상 옹알이와 배밀이를 하는 어린 아이가 아닌 저는 이제는 행동에도 나설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만약 그 '사업'만이 정말 아버지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저는 어머니를 설득해서라도 아버지를 놓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착각이라면.

저는 그 반대되는 행동을 준비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아버지가 원했던 '진실'을 찾아드려야겠죠. 아버지가 무엇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으며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내고 낱낱히 파해쳐서, 그 실체를 아버지의 눈 앞에 들이밀어드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도 외출을 했었습니다. 

소식을 전해듣기 위해서, 소문을 수집하기 위해서.

그 근래에 들어 제 주변에는 자주 '아버지'나 '오빠'가 최근에 들어 이상해졌다고 슬퍼하는 이가 많아졌기에 저는 본의아니게 매일같이 여러 티파티나 사교모임에 참석해야만 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소문의 당사자들은 처음부터 그리 성정이 온화하지 않았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위로를 위해 모인 소녀들은 이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 분위기였죠.

 

하지만 손에 꼽을 만큼 적은 몇 몇 이들은 굉장히 낯선 모습이라고 생각될 기이한 행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차분하고 성실하며 친절한 분들로 소문이 자자했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들은 그게 모두 평소에 쌓인 피로나 스트레스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지요.

실제로, 그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각자의 방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 각자의 방식중에는 모두 공통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름아닌, 청소였지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침실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무 의미없이 자신의 서재와 개인실, 혹은 집안 전체를 샅샅히 뒤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혹은 더 나아가 아예 집을 떠나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렇게 얼마간의 '인내'를 거치고 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와 '청소'를 지시했는데 가족들은 이를 '원래대로' 되돌아온 것이라며 안도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마치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 처럼 화를 내거나 폭력적이게 되지는 않았으니까요.

 

한 사람, 한 사람. 영문모를 심경의 변화를 겪은 이의 가족들을 만나던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혹시나 이러한 변화의 굴곡점이 눈에 띄였던 이유는 이들의 성정이 원래 성실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레짐작으로 넘어가버렸던 '원래부터 그러했던 자'들 또한 사실은 이들과 공통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었지는 않을까.

 

그리고 매우 공교롭게도 이러한 가설의 진위를 확인하던 도중 제 아버지께서도 동일한 행동을 지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도 그런 날이었어요. 저는 바로 그 날 '청소'를 지시받았다는 어느 귀족가의 하녀의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검증을 위해 제 아버지의 서재를 치운 어머니의 하녀를 찾기 위해 어머니의 집무실이 있는 2층에 올라 가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먼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리가 깨어진 소리가 들렸고 비산하는 유리조각에 상처를 입은 어머니를 발견했습니다. 산산히 부서진 조각들 사이로 으스러지는 입매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거울을 던진 것으로도 모자라 무언가를 더 하려고 했었는지 손을 들어올린 상태로 서 계셨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움직이지는 못하고 계셨죠. 어머니가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계셨으니까요. 그는 어머니의 뺨에 맺힌 옅은 핏방울을 보고 놀란듯 얼어붙어 있었고, 창문에 비치는 저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이 놀라 달려오는 것을 핑계삼아 서둘러 바깥으로 도망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분은 거기에 서 있었던 사람이 '저'였다는 것도 몰라보셨던 것 같아요. 그저 누군가가 왔다는 인기척 하나에 놀라,  그자리를 모면하고자 도망치신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의 마음 속 사정이 어찌되었건. 그 순간 제가 신경써야 하는 것은 그런 사소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사제님. 사제님은 바다속에서 스러지는 오래된 고대의 조각상을 보신 적 있나요?

오랜 세월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의 흐름과 작은 물고기들의 지느러미짓, 모래알갱이의 사사로운 움직임으로 미세하게 갉아내어져 가던 오랜된 시간의 흔적이, 의미없는 돌조각으로 바스러지는 순간의 그 광경.

 

저는 아직도 그 분의 드레스가 꽃망울처럼 퍼져나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해요. 

봉긋이 솟아올랐다가, 물결처럼 퍼져나가, 다시는 미동하지 않을 것처럼 축 들어졌던 그 실크의 광택, 어린 짐승의 단발마처럼 새된 소리로 들이마셔지던 한 줌의 들숨.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들이마셨던 숨을 힘겹고, 또 힘겹게 내뱉으셨을 뿐이었어요.
당신께서 왜 주저 앉아있는지 헤아리려고 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만을 꼿꼿히 치켜들고 정면을 바라보며 가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숨을 억지로 밀어넣고 빼내기를 반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을 대신해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진실'과 내 어머니의 '현실'.

언뜻 보기에 그 두가지는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저는 더 이상 벽을 짚고 일어서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가겠다며 허공만 바라보다가 발을 헛딛는 멍청한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구요.

나의 발은 송곳보다도 날카로운 구두굽 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고, 나는 그 상태로 저택의 문턱을 넘어 어디든지 나아갈 수 있었어요. 나의 이름은 후에 대가를 치뤄야 할 지 언정 당장의 힘이 되어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도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들의 소문을 담아낼 귀가 있고, 그들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입이있었으며, 그들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는 눈이 있었다구요.

 

하여 그가 팔던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한 저는 그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유일무이한 '진실'이라 하기에 그의 영혼이 황금의 불꽃으로 타올라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고 그의 무덤 앞에서 위선의 눈물을 흘려주었습니다.

물론 그 분은 행복하셨겠지요. 그것에 '행복'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그와 그의 무리들이었으니 그는 분명 꿈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요. 그러니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어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와 당신께 이 죄를 고백하는 까닭은 제 선택으로 인해 촉발된 죄없는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가 그 '묘약'을 들고 죽었기에 그들은 묘약의 신뢰도와 상품성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존의 묘약이 아닌 대체제를 만들어야 했고 이를 위해 그들은 오랫동안 기회만 엿보던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사실을 제가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제게 알리러온 사람이 있었기에 저 또한 이에 대응하는 수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저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제게 있어서 제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저는 그를 경계하여 마주치지 조차 않으려 했지만 그는 철장너머에서 광인처럼 소리를 지르며 제게 애원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그 사람을 도와달라고. 자신의 생명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멈출 수가 없어 저를 찾아왔노라고.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제가 '행복'의 위험성을 이해했다는 통찰해 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고발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요. 이미 그들의 영향력은 고위 귀족들 사이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면서 말이지요.  또한 그들이 모시는 것은 어찌되었건 '신'이기에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행동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지도 모르니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일을 경계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되물었습니다. 이 조건들에 당신도 포함이 되는 거 아니냐고.
당신 또한 그들과 아주 깊게 연관된 자이며,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듯 보이는데.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하냐고. 그러자 그가 뻔뻔스럽게 웃더군요. 그렇게 하면 된다고. 경계하고, 의심하라고. 그리고 정말 막무가내로 자신의 약혼녀의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짙은 밀밭색 머리를 질끈 묶어올리고 라이트 블루빛 눈동자를 예쁘게 빛내며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정말 뻔뻔스럽지 않은가요? 이미 충분히 주의하고 있는 사실을 되짚어주었으면서 그는 당연하다는듯이 그것에 대해서 대가를 청구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어버렸지요. 너무나도 부자연스럽지만 반대로 자연스럽게.
4명의 용의자가 있다고 하였나요?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 4명은 남자를 둘러싸기만 했을뿐 그 약사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고용한 사람이 배에 타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를 불러 다시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네 사람이 둘러싸고 있으면서 아무도 밀지 않았음에도 그는 배에서 떨어졌습니다. 관찰자는 그가 스스로 떨어졌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그 순간 4명이나 되는 서로 각기 다른 공통점없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면, 그건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정말 그 순간에 그 사람이었을까요?

저는 그가 마지막으로 말한 애원이 거짓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이제부터 일어날 일은 자신의 의지로 멈추거나 그르칠 수 없는 일이라면서.

휴가는 무슨 놈의 휴가를 그렇게 요란하게 가는 것일까. 그 근래의 사건들이 그가 말하던 막을 수 없는 사건들이라는 말일까. 그러나 그의 행동은 온전히 그의 의지로 보였습니다. 정제되지 않고 충동적이던 다른 이들과 달랐어요.

그러나 제 견식은 그가 말한대로 너무나도 평범했었던 것이었습니다.
카브 항구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저는 그 무력함을 뼈져리게 느껴야만했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나를 기억하느냐고. 우리 간단한 약속을 주고받지 않았었느냐고.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말하더군요. 예, 기억합니다 아가씨. 헌데 약속이라니 무슨말씀이신지요?

 

그 대화속에서 저는 낯익은 혼몽의 향기를 느꼈습니다. 고객분들과 사업이야기를 나누고 밤늦게 귀가하시던 아버지에게서 곧 잘 나던 특유의 술냄새였지요. 그의 눈에는 지워지지 않을 별빛의 낙인이 찍혀져 있었고 저는 그가 '얼마남지 않았었다'라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조용히 돌아와 제가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수 밖에요. 저는 그녀가 타라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쓸데없이 재 점화되려는 소문들을 조용히 잠재웠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며 그녀가 말한 보고서를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그녀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길을 떠나겠다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죠.


(소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저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제게 그것이 그 사람이 사랑을 하는 방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오랫 동안 저를 지켜보기만 해왔듯이. 제가 마음을 닫고 그 닫힌 마음을 보며 당신또한 마음을 부스러트렸을지언정 결국 아버지의 손을 먼저 놓지 못하였듯이.
그 사람은 오랜 시간동안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겨주는 말 하나 없이 광대처럼 바다에 몸을 던진 이를 배웅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욕을 하고 원망을 하면서도 동정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연민이란 감정이 왜 사랑이라는 것인지,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고 알고싶지도 않지만. 결국 모든 사건은 일어나고 말았지요.
그러니 이것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결과일 것입니다.

 

하여 그녀는 길을 떠났고 한 줌의 잿가루로 이 도시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소지품은 아직 반호르에 남아있을 테지만 지금쯤 모두 처분되었을테지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녀는 정말로 현명한, 약사였으니.


(소녀는 품속에서 낡은 가죽 노트를 한 권 꺼내보였다.)

 

 

 


이 노트는 어제 새벽에, 반호르의 사제님께 받아온 물건입니다.
주점의 테이블 아래 떨어져 있는 노트를 아르바이트 생이 발견하여 컴건 사제님이 전달해드렸지요. 반호르는 늘 물자가 부족하고 이처럼 질좋은 종이는 주점의 장부로 사용하기에 좀 아까웠을테니까요.
다행히 사제님은 아직 새 노트를 필요하지 않으셨고 사정을 설명하니 곧바로 제게 노트를 되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노트를 그냥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상인의 딸이니까요.

후후후..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우신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처음부터 이 곳에 죄를 뉘우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요.
이미 몇차례 말씀드렸을 겁니다. 저는 제가 내린 결단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설령 시간이 되돌아가는 기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저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앞에 그 물약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가 약사가 바다에 빠지도록 지켜보라고 시키겠지요. 또 제 친구가 먼 길을 떠나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고 제 손으로 그녀의 유해를 거두어 작별의 인사도 없이 모예의 바다로 보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만남을 만들어내었으니까요.
이 하찮은 노력이, 무력한 저항이, 그 누구의 죽음도 막지 못했고, 어떠한 결과도 뒤집지 못했던 그저 질질 끌려왔을뿐인 여정이. 끝내 이곳에 다다라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부탁'으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리하여 그녀의 여정이나 저의 행동들에 대해 위로하거나 격려하거나 칭찬하기를, 원망하거나 비난하거나 치죄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 어머니가 장례식이 끝난 이후 저를 원망하지도 위로하지도 않겠다고 말씀하셨듯이.

저는 이 이야기가 그저 살아가는 과정중에 있었던 이야기로 끝내기를 바랍니다.

약사는 약사의 방식으로, 장사꾼은 장사꾼의 방식으로.
소문에는 소문을, 찬탈자에게는 약탈을.

황금의 신을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별의 심판을.



 


자, 밀레시안님. 저와 거래를 해 봅시다.
제게 돌려주실 물건이 있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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